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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된 ‘ISD 공포’,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
현실이 된 ‘ISD 공포’,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
  • 정민아 기자
  • 승인 2020.03.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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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 5,000억 원의 배상금, 론스타 ISD
전담부서 설치, 전문인력 양성 절실
ISD 진행 과정, 판정문 등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국엠엔에이경제신문] 지난해 말 론스타와 외환은행을 모티브로 한 영화 ‘블랙머니’가 개봉되면서 경제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과 1998년 외환위기(IMF)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다시 ‘론스타 사건’이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론스타 사건은 지금도 17년째 현재진행형이다.

연말에는 이란 다야니 가문과의 ISD 소송에서 패소가 확정되어 약 730억 원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론스타를 비롯하여 남은 ISD 소송들을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현재도 진행 중인 금융 스캔들, 론스타 사건

지난달 19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패소가 확정된 이란 다야니 가문과의 ISD 소송과 관련하여 “올해 금융위의 가장 큰 현안이 될 것으로 생각해, 현재 집중해서 업무에 임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금융위원회 2020년 업무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금융위원회)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금융위원회 2020년 업무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금융위원회)

ISD는 투자대상국 정부가 계약, 인가 등 사전에 정해진 약속을 지키지 않아 외국인 투자자가 손해를 볼 경우, 이를 해당국 법원이 아닌 세계은행(WB)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우리나라에는 2012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때 ISD 조항이 도입됐는데, 당시 한·미 FTA의 국회 비준 동의를 앞두고 2011년 11월 기획재정부는 ‘ISD 우리에게 필요한 제도입니다’라는 홍보 책자를 펴내기도 했다.

홍보 책자에서 “정부 조치가 정당하고 미국 투자자에게 비차별적인 경우에는 ISD 피소 가능성은 사실상 없습니다. 피소 가능성 0%”라며, ISD에 대한 우려는 지나친 기우라고 일축했으나, 2020년 현재 진행 중인 ISD는 모두 4건. 정식 제소 전 단계인 중재의향서가 접수된 3건까지 포함하면 7건에 달한다.

대중적으로 ISD가 알려지게 된 계기는 ‘론스타 사건’을 통해서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 펀드는 1998년 외환위기(IMF) 때 부실채권에 투자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부실채권에만 투자하였으나, 부실화된 기업을 인수해서 구조조정을 거쳐 가치를 높인 후 프리미엄을 받고 재매각하는 ‘Buy-out’ 방식으로 이익을 얻기 시작했다.

론스타는 2003년 8월 당시 자산총계가 65조에 가까웠던 외환은행을 1조 3,834억 원에 사들였다. 론스타는 정부와 코메르츠뱅크가 들고 있던 외환은행 지분의 51%를 보유하며 최대 주주가 되었는데, 문제는 당시 은행법상 론스타와 같은 산업자본은 은행 지분을 10% 이상 매입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로 기업 가치를 나타냄)를 조작해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았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금융당국과 검찰의 조사가 진행됐다.

론스타는 2006년부터 외환은행의 매각을 추진했는데, KB금융지주·싱가포르 DBS·홍콩상하이은행(HSBC) 등과 협상해서 계약이 이뤄지기도 했으나 실제 거래까지 성사되지는 않았다. 결국 론스타는 2010년 11월 하나금융지주와 43억 4,000만 달러에 주식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으로 금융위의 승인이 늦어졌고, 외환은행 매각은 두 차례 수정을 거쳐 2012년 1월 35억 1,000만 달러에 이뤄졌다.

론스타는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금융위가 고의로 승인을 지연하여 15억 7,000만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며 2012년 12월 한국 정부에 ISD를 제기했다. 또한 서울 강남구 역삼동 스타타워 매각과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국세청이 원천징수한 세금이 부당하다며 부당과세 관련 7억 6,000만 달러의 배상도 함께 요구했다.

론스타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블랙머니’의 포스터 (출처: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론스타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블랙머니’의 포스터 (출처: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론스타의 ISD 소송 근거는 한·벨기에 투자보호협정(BIT)이다. 론스타는 벨기에에 있는 자회사인 ‘LSF-KEB 홀딩스’에 외환은행의 지분을 넘긴 후 매각했는데, 2006년 개정된 BIT에 따르면 벨기에 투자자가 국내 분쟁 해결에 실패해 ISD에 제소할 경우 한국 정부는 이에 응해야만 한다. 론스타는 자신들이 두 쟁점에서 모두 이겨 배상금을 받을 경우 벨기에에 납부할 세금 항목이라며 20억 달러 이상의 금액까지 추가하여 한국 정부에 약 47억 달러, 한화로 5조 5,000억 원이 넘는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다.

 

국내 통용되는 제도와 관행, ISD 표적돼

미국계 행동주의 사모펀드(PEF) 엘리엇 매니지먼트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2018년 한국 정부에 ISD 소송을 제기했다. 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결의가 발표된 바로 다음 날, 엘리엇은 주주 자격으로 삼성물산에 합병 반대 의사를 통보했으나 공방 끝에 합병은 최종 승인됐다. 엘리엇은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을 이용해 합병 승인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했고, 그 때문에 주가가 하락해 적어도 7억 7,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계 사모펀드 메이슨 캐피탈 매니지먼트 역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시 정부 개입으로 손해를 입었다면서 한국 정부에 2018년 2억 달러 규모의 ISD를 제기했다.

국민연금에 대한 압력 문제는 이미 국내 법원에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국민연금을 압박한 혐의가 인정되어 1, 2심에서 각각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사안이다. 항소심은 합병 결정 과정에서 청와대의 개입 사실을 인정했다.

당초 대법원까지 항소심 판단을 받아들이면 엘리엇·메이슨 측 주장에 무게가 실릴 것으로 관측되었으나, 최근 ISD 중재판정부가 엘리엇의 요청을 받아들여 특검 수사기록과 법원 1·2심 공판기록 등을 법무부 측에 제출해달라고 명령한 사실이 알려지며 엘리엇·메이슨 ISD 소송 결과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법무부는 “국민연금은 정부 기관이 아니라서 국민연금이 보유한 문서들은 대한민국이 보유하고 있지 않다”며 제출 의무가 없다는 뜻을 밝혔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ISD 중재판정부는 “본 중재재판의 피청구국은 법무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며 “요청된 문서 중 한국 사법부, 검찰청 또는 특검이 보유 중인 문서는 대한민국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ISD 중재판정부의 요구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절 시 소송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 엘리엇과 메이슨이 요구하고 있는 배상금은 한화로 총 1조 1,000억 원 이상이다.

2011년 ‘ISD 우리에게 필요한 제도입니다’ 홍보 책자의 일부 (출처: 기획재정부)
2011년 ‘ISD 우리에게 필요한 제도입니다’ 홍보 책자의 일부 (출처: 기획재정부)

이밖에 스위스 승강기제조업체 쉰들러가 제기한 ISD 소송도 진행 중이다.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증자 과정에서 금융감독원이 조사와 감독 등을 제대로 하지 않아 최소 3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는 입장이다.

쉰들러는 투자한 기업의 성장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장기 투자자로 론스타 등의 투기 자본과는 성격이 다르다. 쉰들러 ISD를 통해 현정은 회장의 과도한 경영권 방어 행위와 계열사 부당 지원, 이에 대한 정부의 감시 소홀 등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선의의 해외 투자자에게 ‘한국이 장기적으로 믿고 투자할 만한 곳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 사례로 분석되고 있다.

 

전문적 대응과 소송 결과 공개 필요성 제기

물론 우리 기업이나 개인도 외국 정부를 상대로 ISD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유난히 빈번하게 한국 정부를 상대로 거액의 ISD 소송 소식이 들려온다. 이유는 정부의 잦은 시장 개입과 규제 정책. 거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는 급격한 정책 변화를 내놓아 다국적 투자자본이 ISD 소송을 제기할 좋은 빌미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을 바꿀 자신이 없었다면 정부는 한·미 FTA 등 각국과 무역 협상을 할 때 ISD 조항을 제외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ISD 소송’이라고 보통 표현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ISD는 법원을 통하지 않고 분쟁 당사자끼리 사적으로 해결하는 ‘중재’다. 따라서 ISD에 제기되면 중재판정부 수당, 중재인(변호사) 수임료 등 중재를 진행하는 비용 일체를 당사자(중재에서 진 쪽)가 부담해야 하는 구조다. 근본적으로 ISD를 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ISD 조항을 제외하지 못했다면, 국내에서 통용되는 정부의 시장 간섭 관행이나 규제가 글로벌 기준에 적합한지 점검하고 고쳤어야 했다. 국제협정을 맺어 놓고 해외 기준에 맞지 않는 관행을 지속하면서 “피소 가능성 0%”라며 안이하게 대응했다면, 수조에 이르는 배상금 폭탄이 떨어져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장 원칙을 충실하게 지켰음에도 ISD 소송을 당할 수 있다. 이를 대비해 ISD 전담부서 설치, 전문인력 양성 등 전문적 대응 체계도 마련해야 한다. 미국 국무부는 산하에 170여 명의 ISD 지원 변호사를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각 ISD 사건에 대해 법무부, 국무조정실, 기획재정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등이 연관되어 있지만, 전담부서는 없는 상태다. 다야니 가문과의 ISD 소송은 금융위가 담당했지만 다른 건들은 법무부가 총괄하고 있다. 여러 정부 부처가 관여하다 보니 누구도 ISD 소송에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고, 책임을 부처 간에 서로 떠넘기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법무부 내 ISD 전담부서가 없을 뿐 아니라, ISD 담당 공무원에게도 순환보직 원칙을 적용하는 점을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꼽는다. 2012년부터 진행된 론스타 ISD의 경우 그사이 담당자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노하우를 축적할 수가 없는 구조인 것이다.

금융위가 론스타 ISD 등에 대응할 목적으로 지난해 7월 금융분쟁대응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지만, 법률 전문가 없이 전담인력 1명만 두고 있다. ISD 소송만을 전담할 변호사도 없다. 특혜 시비를 피하기 위해 개별 사건마다 각각 다른 국내·외 법무법인에 맡겨서 대응하는 실정이다. 이렇다 보니 ISD 소송을 담당하는 법무법인 역시 전문성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미국 국무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엘리엇 ISD 관련 문서. 미국 국무부가 지난달 7일자로 ISD 중재판정부에 ‘국민연금공단의 행위가 대한민국에 귀속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미국 국무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엘리엇 ISD 관련 문서. 미국 국무부가 지난달 7일자로 ISD 중재판정부에 ‘국민연금공단의 행위가 대한민국에 귀속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전문가들은 사전 협상에서 적극적인 대응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쉰들러 측은 ISD 소송에 앞서 3월과 7월 두 차례 정부에 협의 요청 서한을 보내 협상을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에게 성의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ISD 소송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다야니 가문 역시 계약금 반환이 목적이었던 만큼, ISD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계약금의 일부라도 돌려주면서 정부가 사전 조정에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정부에 대한 ISD 제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 제대로 된 전략을 짜서 대비할 수 있도록 다야니 가문과의 ISD 판정문을 공개해 패소 이유를 분석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ISD는 정부의 공공정책에 대한 분쟁이라는 점에서 세계 각국은 온라인 사이트 등을 통해 ISD 절차를 폭넓게 공개하는 추세다. 미국 역시 국무부 사이트를 통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근거로 제기된 ISD 사건을 일괄 게시하고 사건별 문서를 모두 공개하고 있다.

 

[한국엠엔에이경제신문=정민아 기자] jeong@kmn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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