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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 칼럼] 고체가 아닌 액체로서의 인문학
[김경준 칼럼] 고체가 아닌 액체로서의 인문학
  •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 승인 2021.07.08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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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M&A경제] 조선왕조 말기의 혼란기인 1894년 전라남도에서 고부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하여 녹두장군 전봉준의 주도로 발생한 농민봉기를 1970년 후반 중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동학난’으로 배웠다. 후일 알게 되었지만 1962년 신영균 주연으로 개봉된 영화이름도 <동학난>이었으니 당시 통칭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학의 한국사 수업시간에는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 지칭되었고, 농민봉기의 성격규정에 따라 ‘전쟁, 운동, 혁명운동’으로 각각 규정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최소한 ‘동학난’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사진=픽사베이
인간의 역사는 현재의 가치와 관점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해석되어야 한다(사진=픽사베이)

◇역사란 무엇인가?

1980년대 초반 대학생들이 많이 읽었던 책 중에 에드워드 카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있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문구로 유명한 책으로 역사를 역사가의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 꼭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셈이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 없는 무의미한 것이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카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이며,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현재의 가치와 관점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해석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접하면서 ‘동학난’이 ‘동학농민운동’으로 변하는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농민 봉기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이를 해석하는 관점은 변하고 재해석되기에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이후 접하게 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고 과학의 발전도 직선적이 아니라 나선형적이며, 발전과정 자체도 동태적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태양은 지구를 돈다’ ‘지구는 평평하다’와 같은 이론이 정상과학으로 인정받는 지배적 사고방식인 패러다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기존 패러다임이 설명하지 못하는 변수가 발견되고 이를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기존의 정상과학을 부정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인 ‘지구가 태양을 돈다’ ‘지구는 둥글다’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 신구 패러다임이 경쟁하고 갈등하면서 기존 정상과학은 위기를 맞고 과학혁명은 시작된다. 과학의 발전이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인류 문명에 대한 경고로서 자주 제기되는 석유와 자원의 고갈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서유럽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로마클럽은 1972년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출간했다. 인구증가, 공업생산, 식량생산, 환경오염, 자원고갈의 다섯 분야에 대해 1900년부터 1970년까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2100년까지 추이를 예측하였고, 인구가 현재 속도로 증가하고 자원소비가 계속되면 현대문명은 100년 이내에 한계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나아가 20년 후인 1992년 발간된 개정판에서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각각 2031년과 2050년에 고갈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오히려 하락하여 관련업계가 고통을 받고 있다. 확인된 석유매장량은 1950년 15조 배럴, 1990년 150조 배럴에서 2010년 213조 배럴로 급증하였다. 이는 1972년 지식인들의 사고범위가 정태적이고 기술변화의 가능성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셰일가스의 존재는 알았으나 상업적 생산기술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했고, 심해유전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 분석에 입각한 주장도 이처럼 동태적으로 논쟁을 거치면서 실체에 접근한다. 토마스 쿤의 관점처럼 과학도 고체처럼 고정적으로 존재하면서 지식의 확장에 따라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상과학과 새로운 비정상과학을 지지하는 과학자 사회 내부의 갈등과 경쟁을 거치면서 발전하는 동태적 과정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신앙의 대상인 종교의 교리는 속성상 진리를 상징하고 변화가 거의 없지만 인문학은 인간이 이해하는 세계관에 기반한 지식이기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해석되는 영역이다(사진=픽사베이)

◇인문학은 액체인가, 고체인가?

에드워드 카의 관점에서 역사는 고체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재해석되는 역사는 액체처럼 변화하는 것처럼 인문학도 고체가 아니라 액체이다. 고체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액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관점이 변화하고 지배적 패러다임이 교체된다. 

개인적 소양의 차원에서도 20대에 읽던 논어와 50대에 읽던 논어는 수용도가 다르다. 이는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고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동일한 콘텐츠라도 이해하는 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신앙의 대상인 종교의 교리는 속성상 진리를 상징하고 변화가 거의 없지만 인문학은 인간이 이해하는 세계관에 기반한 지식이기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해석되는 영역이다. 

지식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잘못된 지식은 오히려 삶을 왜곡하는 양면성이 있다. 또한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지식은 끊임없이 확장되고 발전해 가지만, 지식을 받아들이는 주체인 인간이 이러한 지식이 확장성과 변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기존 지식에 매몰되어 신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지식의 오류가능성에 대해 일정한 여지를 두어야 새로운 사고와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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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M&A경제=편집부] news@kmn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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