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1:14 (금)
[김경준 칼럼] 식인풍습의 기원과 소멸
[김경준 칼럼] 식인풍습의 기원과 소멸
  •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 승인 2021.06.17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식인 풍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국M&A경제] ‘아프리카에 간 슈바이처 박사가 어느 날 토인들에게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한 토인이 “한 열 명 정도 죽었는가요?”라고 물었다. 슈바이처가 “아니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죽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식인종 노인이 “백인들은 죽은 사람을 먹지도 않는다면서 왜 아깝게 그런 짓을 한담!”이라면서 아쉬워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에피소드이지만 많은 함의가 들어있다. 먼저 발달된 기술로 성능 좋은 무기를 만들어 대량살상 전쟁을 벌이는 소위 문명 세계의 유럽인들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촌철살인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하지만 실질적 이익이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더욱 본질적 의문을 제기한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식인풍습의 기원

『식인문화의 수수께끼(Cannibalism)』 (한스 아스케나시, Hans Askenasy)에 소개된 19세기 식인풍습에 놀란 유럽인에게 미라냐스 부족의 족장의 말이다. 

“당신네 백인들은 악어와 원숭이 고기도 먹지 않더군요. 그건 맛이 좋은데도 말이오. 만일 돼지나 게가 그렇게 많지 않다면 당신들도 악어와 원숭이를 먹었을 것이오. 굶주림이란 괴로운 것이니까. 이는 관습에 따른 문제일 뿐이오. 내가 적을 죽였다면, 그를 그대로 버리느니 먹는 것이 낫소.”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투입과 산출의 에너지 균형이 맞아야 한다. 비용과 이익의 관점에서 음식을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보다 음식 섭취에서 생산되는 에너지가 많아야 육체가 유지된다. 개인 차원의 균형이 맞아도 약간의 잉여 에너지가 있어야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데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의 최저 생존 조건은 개체와 집단 차원에서 에너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식적으로도 음식을 먹어서 얻는 에너지보다 음식을 구하는 데 사용되는 에너지가 많다면 서서히 굶어 죽게 된다. 따라서 끊임없이 먹이를 구하는 운명은 다른 모든 생물과 인간이 다를 바가 없다.

식인의 문제도 비용과 이익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역사시대에 들어와 문명화가 시작되면서 식인은 도덕과 윤리, 종교 차원에서 강력하게 억제되어 왔다. 그러나 문화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식인풍습은 고대로부터 많이 관찰되며, 20세기 초반에도 원시 부족들에게 남아있었던 현상이다.

원시시대의 식인은 전쟁에 승리하고 난 후 포로의 인육을 먹으면서 승리를 확인하거나, 조상들의 일체감을 위한 주술적 의식의 일종이었다. 따라서 지능을 가진 다른 인간의 고기를 먹기 위한 전쟁은 실익이 없었지만, 동시에 전쟁에 이긴 후에 포로의 고기를 먹는 것은 부수적 이익이어서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이 시작되어 1인당 생산성이 높아지고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식인은 전쟁의 부수적인 차원에서도 이익이 없는 행위로 바뀐다. 하지만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지적했듯이 이는 효율의 관점에서 유지되기 어려운 구조였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오늘날 사라진 식인풍습

‘국가의 형태를 띤 정치 조직의 출현과 함께 전쟁 식인풍습은 돌연 사라졌다. 부족이나 부락 사회는 낮은 생산성 때문에 포로가 잉여를 생산하지 못하면 살려 두는 것은 먹여야 할 입이 하나 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반면 국가 사회에서는 포로가 잉여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먹기보다는 그들의 노동력을 유지하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 마빈 해리스

전쟁포로를 처리하는 방식은 바로 생산성의 증가와 사회조직의 특성을 반영한다. 즉, 생산성이 낮은 수렵단계에서 전쟁포로는 존재할 수 없었다. 포로도 먹어야 살기 때문에 식량을 배당해야 하는데, 집단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먹이를 구해야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생산력의 수준에서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의 고기라도 먹어서 전쟁의 손실을 보충하고 정신적 승리를 확인하거나 아니면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 당연했다. 농경시대의 초기에 들어서면서 적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데서 오는 이익과 목숨을 살려주고 노예로 삼아서 평생 일을 시켜서 오는 이익이 비교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물론 노예는 호시탐탐 도망이나 반란을 도모하는 위험이 있기에 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비용도 포함되어야 한다.

점차 생산력이 높아져서 노예로 부리는 것이 이익이 되는 시점에서 포로를 죽여서 고기를 먹는 식인풍습은 사라지고, 대신 전쟁포로를 노예로 만들어 평생 일을 시키게 된다. 그리고 노예의 경제적 가치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노예를 거래하는 시장도 생겨난다. 경제적 배경에서 식인풍습은 사라지고 노예로 대체되면서 식인을 금기시하는 다양한 도덕적 논리와 종교적 가르침도 생겨났다. 비록 노예를 시민과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는 않고 ‘말하는 가축’ 정도로 대하였지만 그래도 소, 돼지, 양과 같이 먹어도 되는 가축들과는 구분하였다. 

오늘날에 식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 악덕이다. 그렇다고 소위 식인풍습이 있었던 과거의 모든 종족을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관점이다. 이 대목에서 한 번 생각해 볼 점은 도덕과 윤리에 내재되어 있는 동기의 다양성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문화와 행동의 이면에 깔린 다양한 동기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국M&A경제=편집부] news@kmnanews.com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